긴 회의를 마치고 집에 들어서는 순간, 현관문에 기대어 잠든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팔목의 스마트워치가 연신 진동을 일으키는데도 깨지 못했죠. 요즘 신문에 실린 ‘디지털 피로도’ 기사가 떠올라 소리 없이 웃었어요. 기술이 우리 삶을 편리하게 해주지만, 정작 그 기술이 우리 사이에 차가운 강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들이 있네요.
깨어있는 기계들 사이 잠든 사랑
자정이 넘은 집안에선 두 대의 스마트폰만이 불면증을 앓고 있어요. 누군가에게 보낸 대화창을 열어둔 채 키보드 위에 손을 얹은 채 잠들었고, 발치에 떨어진 태블릿에서 배터리 부족 알람이 깜빡이는데도 그대로 소파에 누워 있었죠.
가전제품들만 홀로 작동하는 이 야경 속에서, 우리는 마치 서로에게 배터리 부족 상태 경고등을 켜놓은 기계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건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가족 모임에서 일어났던 작은 소동 기억나시나요? 테이블 위 화면에 비친 우리 모습이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어요.
신호등 없는 교차로에서 만난 소리들
일주일에 세 번 ‘디지털 서약’을 시작했어요.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모든 기기의 경고음을 끄고 살아보자는 작은 결심이었죠. 처음 며칠은 마치 알약을 삼키지 않은 감기 환자처럼 불안해했어요.
그런데 알람 없는 그 시간에야 비로소 들리는 소리들이 있었어요. 아이가 혼자서 옷을 입을 때 내는 작은 흥얼거림, 창틀을 두드리는 봄비 소리, 설거지하며 나는 물소리까지.
빈 알림창만큼 가득 찬 오늘
특별했던 아침을 기억하시나요? 휴대폰 알람 없이 자연스럽게 눈을 뜬 날이 있었어요.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핸드폰이 배터리가 방전된 상태였지만, 그날따라 모든 일이 잘 풀렸죠.
어느 길었던 주말 오후, 아무 계획 없이 버스를 탔어요. 내비게이션 대신 운전기사님의 ‘이 길로 가시겠어요?’라는 질문을 선택했죠. 우회길에서 마주한 벚꽃 길이 우리 가족의 갤러리를 화려하게 물들인 건 덤이었죠.
(마무리) 픽셀 너머에 선 우리의 모습
어젯밤 아이가 묻더군요. ‘스마트폰 없으면 엄마 아빠도 잊어버리나요?’ 그 순간 습관적으로 잡던 핸드폰을 끄며 아이를 안아주는 모습을 보았어요.
하이테크 기기들에 둘러싸여 살지만, 정작 필요한 건 그보다 투명한 존재감이라는 걸 아이가 가르쳐주었네요. 디지털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데이터는 마음 속에 저장된 살아있는 순간임을 매일 배워갑니다.